12월 ②편 - 죽음을 꿈꾸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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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예슬(상담팀) 등록일 22-12-05 13:29 조회수 1,960 영역 정신건강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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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자살예방센터 센터장
협동조합 행복농장 이사장
사단법인 세계의심장 상임이사
자녀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 2편. 자살
죽음을 꿈꾸는 아이들
2022년 봄, 제가 쓴 책 『(죽음)을 꿈꾸는 아이들』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제가 만났던 자살사고를 가진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다소 파격적일 수 있는 이 책의 제목에는 아이들을 만나며 했던 저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아이들은 죽음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저는 아이들이 죽음 자체를 꿈꾸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아이들은 죽고 싶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다 끝내고 싶어요.”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죽음은 힘든 현실의 돌파구를 의미합니다. 집, 학교, 학원을 쳇바퀴 돌듯 반복하는 생활에 대해 아이들은 “의미도, 재미도, 흥미도 없다.”라고 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드는 의문감과 이유를 모르는 혼란을 겪으면서, ‘죽어도 상관없는’ 상태가 됩니다. ‘살아도 상관없고, 죽어도 상관없으니’ 오토바이를 위험하게 타고, 옆을 살피지 않고 무단횡단을 하는 등 자신을 돌보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노는 것도, 사는 것도 지쳐서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정작 죽어버리기에는 남겨질 사람이 걱정되고, 죽는 과정도 힘들 것 같아 망설입니다. 이 단계를 지나 주변 사람을 생각할 여유와 죽을 때 경험할 고통에 대한 우려 마저 없어지면 ‘자살하고 싶다’라는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처럼 ‘죽어도 상관없다’, ‘죽고 싶다’, ‘자살하고 싶다’라는 세 가지 구분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짚어봐야 할 부분입니다. 제 진료실에 오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죽어도 상관없다’와 ‘죽고 싶다’ 사이에서 옵니다. 그렇지만 때로 ‘죽고 싶다’와 ‘자살하고 싶다’ 사이에 있는 아이들, 그중에서 ‘자살하고 싶다’로 마음이 기운 아이들을 만나면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 사회는 자살사고를 가진 이들을 불온한 존재로 치부하며 자살을 개인의 정신병리적 문제로 미룹니다. 하지만 저는 붕괴된 공동체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표현이지만¹ ‘학교 밖 청소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은 배움의 공동체인 학교를, 가출 청소년은 돌봄의 공동체인 가정을 부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자살은 어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나 학교 안 갈 거야.”, “나 집에 안 들어갈 거야.”, “내가 죽어버리면 되지.”라고 하는 말을 단순히 아이들 개인의 반항과 일탈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면에 있는 무너진 공동체에 대해 고민하고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아이들은 이 세상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자신의 책 『시지프 신화』에 이렇게 썼습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책세상, 1998
살만한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이 물음은 우리가 자살을 생각하는 아이들과 삶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삶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자살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료실에서 아이들과 죽음에 관해 토론합니다. 때로 정말 자살 생각이 깊은 아이와 자살이 합리적 선택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죽음을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는 없는지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해요?”라며 놀라는데, 중요한 것은 태도입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의 그 간절하고 아픈 마음을 알아주는 것, 불확실한 죽음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는 무(無)의 상태가 될지, 사후세계로 갈지, 사후세계를 간다면 거기에서는 또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 이렇듯 불확실한데, 아이들은 왜 죽음을 통해 원하는 삶을 얻으려고 할까요? 아이들은 단지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가 아닌 삶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죽고 싶다’라는 말은 곧 ‘(이렇게는) 살기 싫다’라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앞서 소개한 저의 책 『(죽음)을 꿈꾸는 아이들』에서 괄호 안의 ‘죽음’을 지우고 ‘새로운 삶’으로 바꿔봅시다. 그렇다면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을 꿈꾸는 아이들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먼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죽음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죽이고 싶은 대상을 찾아서 그것을 잘 죽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아이에게 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지금 삶을 죽이면 되지 않을까? 그러고 나서 다른 삶을 살면 되는 거 아니야?”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이는 상징적, 은유적, 초점적 자살을 의미합니다. 한 아이는 진료실에 올 때마다 일기장을 보여주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일기장을 며칠 동안 보관했다가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는 일기장이 없는 시간이 너무 편안했다고 합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 일기장을 태우며 아이를 힘들게 했던 기억과 일기를 써야만 했던 압박감, 일기를 쓰는 순간에도 의식하던 타인의 시선까지 함께 태우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 어떤 아이는 개명을 하고 나서 그때까지 살아온 자기 삶을 죽이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도를 저는 ‘자살 연습’이라고 명명합니다. 저는 청소년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은유와 상징이 사라진 시대라고 느낍니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런 시도가 ‘자살을 예방’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자신의 모습을 죽이고 좀 더 나은 자신으로 살고 싶은 것은 어쩌면 우리의 원초적 욕구가 아닐까요?
¹‘학교 밖 청소년’이란 단어는 학교 안이 올바른 곳이고, 학교만이 정답이라는 인상을 준다. 어떤 아이에게 학교는 좋은 공간이 아닐 수 있으므로 학교를 그만둔 선택을 존중해줄 수 있지 않을까? 관점을 바꾸면 ‘학교 밖’은 ‘사회 안’이 된다.